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2 상하이 쿠데타 (문단 편집) == 여담 ==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해. 우리는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지.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 >---- >- [[인간의 조건]] 에서 >'''“우리의 모든 세계가 무너졌다”''' >---- >- 독립운동가 [[김산]] [* 당시 북벌에 참여했던 한인들은 북벌이 끝나면 한반도로 진군해서 일본을 몰아 낼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수 있는데 국민당 입장에선 굳이 지금 중국내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들을 상대하는것도 벅찬데 그리고 미국, 영국 과 같은 열강들의 비판까지 받는 상황에서 굳이 일본까지 확전할 이유도, 여유도 뭐도 없는 것이다. 그때 당시 한반도 독립운동가들의 세계사적 국제정치역학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얄팍한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 그러나 이건 중국 측에서 확전을 실행한다는 전제 하의 비판이고 실제로는 일본이 한반도 다음으로 만주를 노리고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즉 북벌이 완수되면 만주를 안정화하려는 중국과 만주를 침략하려는 일본의 대결은 (실제 역사에서 그랬듯이) 필연이고 중국에 거대한 시장과 이권을 확보한 열강으로서는 기존의 분할을 무시하고 만주, 나아가 중국 대륙까지 독점하려는 일본 편을 언제까지 마냥 들어줄 수는 없다는 것. 실제로 태평양 전쟁의 경제적 원인인 ABCD 포위망은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니. 재중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국민혁명에 투신한 것을 국제관계에 대한 무지로 치부하기보다는 나름대로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 시점에 대한 예측 그리고 정작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의 분열이 문제였던 거지.] 조너선 펜비는 상하이의 자본가들을 상하이 쿠데타의 '두번째 희생양'으로 묘사하며 장제스에게 그들은 그저 유용한 자금 출처로만 보였다고 쓰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의 기술로는 동시대 작가 오언 채프먼의 기록이 있는데 채프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부유한 중국인도 자신들의 집에서 체포되거나, 거리에서 묘연히 실종되었다가 가난뱅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압제자들을 밀고하기 위해 입을 여는 사람은 결코 없었다. 백만장자도 공산당원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실제로 장제스는 금융위원회를 설립하여 상하이의 자본가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는 연간 2000만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이후 장제스가 빠진 우한정부가 거둬들이는 세입의 2배가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상하이의 거물 자본가들의 자식들을 상대로 유괴까지 감행했다고 기술한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에선 이 공산당원과 규찰대들을 장제스에게 곱게 바쳤음에도 권력욕에 찬 장제스에게 배신당한 순진무구한 인물들로 묘사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레이 황 교수는 이러한 기존 시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무장한 노동자들이 그렇게 미숙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들이 잘못된 지도를 받아 경계심을 완전히 풀어놓았기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긴장 상황은 이미 폭발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4월 12일까지 급진주의자들의 행동과 그에 반대하는 행동이 여러 도시에서 폭발했다. (장제스의 대응 조치를 설명) 이런 조치는 최후의 행동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77페이지. 황푸군관학교 제5기 졸업생들은 참으로 혼란을 겪었는데 우한에서 졸업을 맞이한 3,4,5 중대 소속 800명의 생도들은 군벌 장제스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윈다이잉]]의 졸업 연설을 들은 반면 난징에서 졸업을 맞이한 1,2,6중대 소속 1480명의 생도들은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장제스의 메시지를 허잉친을 통해 들었다.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에서 이 쿠데타가 서구 열강의 사주란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편은 사실관계 자체는 그럭저럭 잘 서술했어도 해석에 있어서 80년대에 최고조를 달렸던 혁명사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계가 있다.[* 가령, 4.12 정변에 대해서는 상하이 자본가들과 열강의 작품이라는 기존 시각.] 하지만 상하이에 이권을 가진 서구 열강이 사주까지는 몰라도 방조내지 묵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이 쿠데타는 장제스가 자신의 대가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벌인 쿠데타였다. 왜냐하면 장제스의 유일한 아들인 [[장징궈]]가 당시 소련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쓸어버린 후에 소련에서 당연히 보복으로 장징궈를 처형할 것으로 알고 자신의 대가 끊어졌다고 한탄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물론 가족의 대를 잇는 건은 중요하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자식이라면 없는 편이 더 낫다.'''"라고 서술하였는데, 고자인 탓에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장제스 입장에서는) 국가를 위해 자식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장제스는 얼마 후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에 장징궈가 장제스를 맹비난하는 편지를 올린 것을 보고 "소련이 장징궈를 죽이진 않겠구나"하고 매우 기뻐했다. 이 쿠데타 소식들을 들은 스탈린은 그제야 장제스가 '즙을 다 짜 낸 레몬'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국공합작과 중국의 적화에 열심이었던 카를 라데크, 아돌프 요페, 안드레이 부브노프, 게오르기 퍄타코프 등은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들 파벌의 수장 [[레프 트로츠키]]도 결국 스탈린을 이기지 못하고 몰락한다. 후일 트로츠키는 코민테른을 이끈 니콜라이 부하린과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를 크게 비판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또한 항일운동을 위해 국민당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한인 역시 이 사건에 휘말려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장지락에 의하면 4.12 상하이 쿠데타에 이은 [[4.15 광저우 쿠데타]] 때 한인 20여명이 좌경혐의자로 체포되어 14명이 육군감옥에서 처형되었다고 증언하였다.(아리랑, 132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